Alert!! 10번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말로 치.명.적.인. 천기누설의 온퍼레이드입니다.
내키지 않으시는 분은 재빨리 도망가 주십시오. 어서! 지금 당장!!
(경고했습니다. 나중에 뭐라고 불평하셔도 모릅니다)
...and less.
(전략)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경찰 한 명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고, 이어진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나자빠졌다. 성당 안에 두둥실 바람이 일었다. 구르듯이 달려나온 미도리가――가장 가까이 있던 미유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미유키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유키의 시야에는, 얼굴에서 피를 뿜으며 몸부림치는 경관과, 얼굴을 누르고 허위적대는 또 하나의 경관과, 허둥허둥 일어나는 아라노와, 이소베와, 쯔바타와, 입을 벌린 시바타와 의자를 박차고 이리로 달려오는 키바와, 이마가와와 마스다와, 기민하게 뒤쪽으로 우회하여 버티고 선 탐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추젠지의 말이 왠지 아주 아득하게 들려왔다.
「내게 이 자리에서 전부 퇴치하라는 건가!!」
미유키는 조금씩 오감을 되찾았다.
목덜미에 이물감――차갑고 흉폭한 것.
뾰족한 것이 목에 밀어붙여져 있다.
미유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물새 무늬가 보였다.
그곳에서 새까만 채찍 같은 것을 움켜쥔, 가늘고 하얀 팔이 뻗어나왔다. 채찍 끝이 뺨에 닿아 있다. 미유키는――망자의 옷에 감싸여 있다.
백단향이 풍겼다.
그리고 이 향기는.
――가루분의 냄새?
야치요라는 사람의 기모노.
검은 성모는 더 이상 없다.
그럼, 이 하얀 팔은.
――명계에서 뻗어온 여인의 팔.
귓가에서, 전율하는,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뭐예요. 뭐가 잘났다고! 음탕한 창부 주제에 목에 힘주고 설교하지 말아요! 그래, 여기에 설령 악마가 없다 해도 난 악마야! 누구도 내게 벌을 줄 수 없어! 나는 인간이 아닌 자. 사람을 저주하고 주를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는, 더럽혀진 영혼을 가진 악마의 딸이야! 붙잡을 수 있거든 얼마든지 붙잡아봐요!!」
미도리――.
미유키는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 망자의 옷을 두른 미도리가, 미유키의 목에 칼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건――카와노 유미에의 유품이에요. 자아 어머니, 난 지금 사람을 다치게 했어요. 보고 계셨나요? 지금부터 여기 있는 미유키 상을 죽이겠어요. 어떠신가요?」
――죽여?
「그만두어요 미도리! 대체 무얼 생각하는 건가요! 미유키 상을 어서 놓아주세요!」
모친은 처음으로 딸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제야 겨우 소리를 높이셨군요 어머니!! 그렇죠, 살인에 폭행상해는 중죄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집안이 위험하니까!!」
「미도리!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미유키 상을 어서 놓아요!」
「그것 보세요. 어머니는 친딸인 나보다도 미유키 상이 훨씬 걱정되시는 거죠? 당연해요!! 나처럼 불길하고 꺼림칙한 아인 죽어버리는 편이 나았을걸!!」
――뭐지?
미도리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 어둠은 대체.
기도사가 퇴치하지 않고 남겨두려 한 부분인가.
그곳에 신의 자리는 없는 것인가.
미도리가 말했다.
「미유키 상――」
아직 성숙하지 못한,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
「――미안해요.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그렇지만, 당신도 나빠요――나는 당신이 부러웠어――」
부러워?
「――죽어주세요」
스윽. 목덜미에 섬뜩한 것이 파고들었다.
「멈춰! 자네는 오해하고 있어――」
기도사――.
「――미도리 군이 이토록 오리사쿠 가를 저주하는 이유는, 자네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어떤 의혹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오해일세!!」
「출생? 의혹이라뇨? 대체 무슨 말입니까――」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미도리의 어머니인가.
귓전에서 앳된 목소리가 앙칼지게 외쳤다.
「시침떼지 말아요! 더러운 창녀!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당신네 부부가 얼마나 추하고 지저분한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어째서 낳게 내버려뒀어요! 날 괴롭히고 비참하게 하면서 재미있어 하려고!!」
「무――무슨 말을? 미도리, 무얼 말하고 있는 건가요! 미도리, 똑바로 말해요!!」
모친이 평정을 잃었다. 숨결도 거칠다. 미도리의 심장이 크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들었어요. 전부 들었어. 나는 더러운 인간이에요! 아직도 잡아뗄 작정인가요. 좋아요! 말하겠어요! 똑똑히 들으세요!!」
미도리는 미유키를 방패로 삼고 있다.
――스기우라와 똑같은 장기말.
방금 전의 스기우라 다카오와 완전히 같지 않은가.
――이건, 이 기모노의?
망자의 옷에 잠든 마력?
미유키의 좁은 시야 끝에 검은 신상이 잡혔다.
――신상은. 한 쌍입니다――.
미도리는 방향을 바꾸었다. 미유키의 시야가 회전했다. 하얀 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에 어둠을 품은 소녀는, 둘러싼 어른들과, 둘러싼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고립된 소녀는, 마지막 한 톨마저 쥐어짜듯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아버지 오리사쿠 유노스케와, 언니 유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그렇지요!!」
견고한 건물벽에 반향하여, 사위스러운 말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유키의 귀에 파고들었다.
이것이 암흑의 정체인가.
「무슨――말도 안 되는――」
「그랬으면 나도 좋았겠지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어. 슬프고 괴롭고, 고민스러웠어! 믿고 싶지 않아서, 조사도 해봤어요. 내가 태어난 쇼와 15년(1940년)에, 언니는 1년 정도 집을 비웠었지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언니가」
「그건――병 때문에――」
「나도 알아요. 장기 요양이라고요. 이상해요. 핑계일 뿐이야! 어딘가에서 날 낳은 거야!」
「그렇지 않아!!」
「유카리 언니는 늘 상냥했어. 나는 거의 대부분 어머니가 아닌 언니 손에 자랐어요. 사실을 알았을 땐 온몸에 소름이 끼쳤어! 더러워! 짐승만도 못해! 나는 언니를, 아버지를, 오리사쿠 가를 저주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추한 나 자신을 저주했어. 그러니까 내게는 이것밖에 길이 없었던 거야. 사악함을, 모독적인 행위를 긍정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정당화할 수단이 없었단 말이에요! 뭐예요! 당신들 모두를 증오해! 다 죽어버려!!」
스윽.
목이.
「미도리 군, 그건 전부 지어낸 이야기야!」
――추젠지――상.
검은 옷의 남자는 대열에서 한 걸음 걸어나왔다.
제령하는――건가?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서글퍼 보인다.
「내 말을――들어」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요? 당신은 내게서 마력도 사역마도 전부 빼앗아갔어. 그럼 나는――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채찍에 달린 칼날이 미유키의 숨통을 자극한다.
「그러면 안 돼. 방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미도리 군은 악마가 아니야. 악마는 될 수 없어. 잘 듣게! 돌아가신 유카리 상은 선천적인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어. 때문에 본디부터 오래 살 수 있는 몸도 아니었지. 아이는 낳지 못해」
「거짓말 말아요. 들은 적도 없어」
「비밀이었으니까. 그렇지요 부인」
미도리의 어머니――.
모친은 의연한 모습 그대로 당혹해 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아이는――유카리는 길어봤자 10년이라고 했어요. 가엾어서 그 아이에겐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요. 우리는 언젠가 그날이 오리라 각오하고, 그 아이가 하다못해 미련은 남기지 않도록,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숨기기로 했던 겁니다」
「들었겠지. 미도리 군, 유카리 상이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 리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유카리 상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거야. 여자는 살림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도, 내향적이었던 것도 아닐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에 대해서는――시바타 상,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과 유카리 상의 혼담이 깨진 이유도, 오리사쿠 가가 비밀을 밝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유카리 상에게 발각되면 안 되니까, 표면상으로는 조건이 맞지 않았던 걸로――」
「거짓말! 그 혼담도, 아버지가 언니를」
「있을 수 없어. 자료에 따르면 미도리 군은 유카리 상과 유노스케 씨의 아이가 될 수 없네. 혈액형이 맞지 않아. 미도리 군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배덕의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일세. 자네는 유노스케 상과――여기 마사코 상의 딸이야」
「거――거짓말 말아요! 이 사람은, 나한테 이제껏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어! 웃어준 적도 없었단 말이에요!!」
「미도리!」
어머니가 외쳤다. 떨리는 손을 미도리에게 뻗는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 나름대로의 애정이 있는 거야.
「당신은――당신만은 나와 유노스케 사이에 태어난――아이입니다! 당신을 낳은 사람은 나예요. 이것만은――믿어줘요, 믿어주세요!! 제발」
미도리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럼――그럼 나는――」
기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 군, 미도리 군에게 거짓 사실을 불어넣은 사람은――자네에게 고해실의 열쇠를 넘겨준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자네는――」
「싫어. 나는, 나는――」
미도리의 몸이 떨어졌다.
미유키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야. 그건, 그러면――」
「속았던 걸세. 그 자가――진범이야」
경관이 움직였다.
안 돼, 아직 일러! 추젠지가 외쳤다.
콰당. 문이 활짝 열리며, 세상이 빙글 돌았다.
미도리가 미유키를 떠다민 것이다. 세상이 슈욱 덮쳐들어 온다. 미에가 달려온다. 탐정이 미유키를 넘다시피 지나쳐 밖으로 뛰어나갔다. 형사들이 달린다. 키바가 탁한 목소리로 고함친다. 이봐, 저 애를 어서 보호해 꾸물럭대지 마 병신들아. 성당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읽지 못하는 히브리어. 견고한 건물이 흐물흐물 일그러졌다.
세상이 진작부터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결정권이 없다면, 그건 스스로 살고 있지 않음과 같은 의미.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예비되었던 세상이 허위와 거짓이었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믿고 있는 세계가 반드시 진실만은 아니다. 진실만이 아니라고 알고는 있어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믿지 않고 어떻게 세계를 이해해야 할지 미유키는 알지 못했다. 미도리가 믿고 있었다면,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아파도 그것은 미도리에게 현실이었다. 미도리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 세계가 한낱 허구에 불과하며 단지 미도리만의 것이었다고 해도, 미도리에게 그것은 바로 몇 분 전까지 현실이었다.
미도리는――거짓에 속아 인간을 상실했다. 현혹되어서 신을 상실했다. 그리고, 허식 위에서 허세를 부려 가까스로 지탱해 온 현실을, 세계를 상실했다.
상실할 바에는, 괴롭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계속 속고 있었던 편이――차라리――.
그렇기 때문에――그 기도사는,
지금은 퇴치하지 않겠다고―――.
그랬었는데,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망자의 옷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무척 느리다. 고운 무늬였다.
백단향에 분 냄새가 감겨든다.
그 주위를 다른 세상의 주민들이 원이 되어 돌고 있다. 악마와 마녀가 날뛰는 문란한 세계에 무미건조하고 멋없는 경찰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렇게 미도리는 돌고 있어. 돌면서 경계선을 긋고, 자신만의 세상을 되찾고 있는 거야――.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에의 목소리에 붙들려 미유키는 되돌아왔다.
탐정이――외쳤다.
「네놈들은 방해만 된다. 설쳐대지 말고 빠져!!」
미도리는 샘을 등지고 광란하고 있었다.
수많은 경관에게 둘러싸여, 채찍을 미친듯이 휘두르고 있다.
거칠고 험한 사건밖에 다뤄보지 않은 투박한 경관들은, 세계를 상실한 작고 어린 소녀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원은 조금씩 좁혀지지만,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한다. 추젠지는 반쯤 제정신을 잃은 미도리의 어머니를 잡아끌고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려 한다. 탐정이 경관들을 밀어붙이고 길을 열려 하고 있다. 키바가 고함쳤다.
「이놈들아 비켜! 사내놈들이 떼거리로 어린앨 위협하기냐!! 저리 못 비켜!!」
총성이 울렸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금이 간 미도리의 마음을 산산조각내는 데는 충분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추젠지가 경찰에게 호통을 쳤다.
미도리는 무어라 외치고 경관에게 달려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경관은 흠칫하여, 한 명의 뺨이 날카롭게 찢기고, 공포가 혼란을 가중해, 원이 흐트러지고, 미도리는 그 일각을 돌파했다.
「그 괴상한 방은 어디냐!!」
탐정이 소리쳤다.
미도리가 예배당을 향해 달려간다.
참언(讒言)에 속아 신을 잃고, 인간을 잃고, 세계를 잃은 하얀 얼굴의 타천사는, 악마에게 하사받은 망자의 옷을 두르고 딱딱한 돌길 위를 내달렸다.
선명한 물새 무늬가 나풀나풀 나부낀다.
그날 밤과 똑같다. 나풀. 나풀나풀.
마치 슬로우모션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던 모양이다.
잘려나온 필름의 한 컷이, 미유키의 망막에 계속, 계속 비치고 있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발이 빠른 탐정도 굳건한 형사도, 썩도록 넘쳐나는 수많은 경관도, 누구 하나 미도리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미도리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탐정과 키바가 그 뒤를 쫓고, 뒤이어 형사와 경관들도 돌입했다. 그 또한 일순간에 벌어졌으며, 모든 것이 불과 수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괴상한 방? 그런가――저기에는, 예배당에는 고해실이 있어――아뿔싸!!」
추젠지는 화살같이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미유키도 미에의 손에서 빠져나와 그 뒤를 따랐다.
「어떻게 됐나! 잡은 건가!!」
예배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추젠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마어마한 반향이 예배당을 진동시켰다. 무수한 사람들이 한 구석에 몰려들어 있다. 대답한 것은――탐정이었다.
「여기다! 여기로 들어갔어!!」
탐정은 오른편의 커다란 목제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괴상한 방――열리지 않는 고해실이다.
탐정은 둘러싼 경관들에게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바보 형사놈들이!! 저 남자에게 맡겨두었으면 좋았을 일을!! 타이밍도 못 맞추는 어리석은 놈들에게 사건에 개입할 자격은 없다!!」
「비켜 에노!!」
키바 형사가 돌진하여 문짝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제기랄!」
「이봐, 이 문을 어서 열어. 속히 투항해라!」
다가온 아라노가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에 키바는 안색을 바꾸고 아라노를 때렸다.
「이 머저리가! 말은 가려해! 병신 새끼!」
아라노는 맞은 뺨을 누르고 우와우와 죽는 소리를 질렀다.
시바타가 창백히 질린 미도리의 어머니를 데리고 들어왔다.
초췌해진 시바타는, 그럼에도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부인과 함께 고해실로 향했다. 미유키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 문득 몸을 돌려 추젠지를 보았다.
기도사는 붙박힌 듯이 서 있었다.
좋지 못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무엇을――.
무엇을 예측했지?
모친은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와, 쓸모없는 경관들을 좌우로 헤치고 열리지 않는 고해실의 문 앞에 섰다.
어머니는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미도리 상. 이제, 이젠 괜찮아요. 당신이 어째서 이래야만 했는지 잘――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미유키는 참을 수 없었다.
저 방은 외톨이인 미도리만의 방이다. 나쁜 말에 희롱당하고 절망한 미도리는 거기에서 악마를 만나, 악마를 자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누군가의 함정이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유키는 달렸다.
예배당에서 달려보는 게 꿈이었다.
성당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게 꿈이었다.
언제나 신성한 장소에서 소란을 피워보고 싶었다.
소란을 피워도 달려도 외쳐도, 이래서야 조금도 즐겁지 않아!
뚜벅뚜벅 발소리만이 울렸다. 미도리, 미도리――어머니가 부르고 있다.
미유키는 고해실로 달려갔다. 열리지 않는 문이 눈앞으로 닥쳐들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미도리!」
문이 열리고, 물새 무늬의 등이 나타났다.
등은 한 번 휘청 떨리고,
――막대기가 쓰러지듯.
미유키를 향해, 위를 보고 무너졌다.
기모노의 소매가 철럭 부풀고, 힘없이 가라앉았다.
찰랑찰랑한 새까만 머리카락이 돌바닥 위에 흐트러졌다.
「미――도리?」
세설(細雪)처럼 새하얀 피부.
촉촉한 긴 속눈썹에 감싸인,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
오른쪽 눈에는 예배당의 천장이 비치고.
왼쪽 눈에는.
검은 끌이――깊숙이 박혀 있었다.
「미도리!」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두세 번 경련하고,
멎었다.
「아――안 돼――!」
어머니는 숨이 막힐 듯한 비명을 지르며 딸의 몸을 감싸듯이 그 위로 무너지고, 미유키는 푸슬푸슬 주저앉아 문 안을 보았다.
방 안에 흑표범 같은 남자가 있었다.
「나를――나를 보지 마!!」
사내는 보고 있는 미유키가 아닌 미도리의 어머니를 덮쳤다.
「히라노! 이 새끼!!」
사내는 달려드는 키바를 민첩하게 피하고, 미도리의 안구를 꿰뚫은 끌을 뽑으려 손을 뻗쳤다. 뻗친 손을 탐정이 차올렸다. 걷어채인 손목을 즉시 키바가 틀어쥐었다. 키바는 돌아선 사내의 뺨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갈겼다. 사내는 날려가다시피 경관들 속에 처박혀, 여러 명에게 짓눌려 바닥에 엎어졌다. 키바는 경관들을 밀치고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세 번 더 때렸다.
「이 자식, 여잘 몇 명 더 죽여야 속이 후련하냐!!」
네 번째로 들어올린 주먹을 추젠지가 붙들었다.
키바는 몸을 돌려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본다.
추젠지는 잠자코 남자의 멱살을 키바의 손에서 낚아채, 사신 같은 눈으로 얼굴을 노려보았다.
주먹을 쥔다. 그러나 움켜쥔 주먹은 올라가지 않았다.
추젠지는 낮은 목소리로 저주하듯이 내뱉었다.
「네놈 따위――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
「엣?」
사내는 정지했다.
추젠지는 남자를 홱 떠다밀고, 미도리 쪽으로 향했다.
이소베와 도쿄에서 온 형사가 미도리의 어머니를 짊어지다시피 일으켜세우고, 경관들이 미도리를 둘러싸고 있다. 웅크리고 앉은 쯔바타가 돌아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젠지는 형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미도리의――미도리의 시체를 안아 일으켜,
조심스럽게 망자의 옷을 벗겨냈다.
그리고 옷을 손에 들고 유령처럼 스윽 몸을 일으켜, 흡사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다시 한 번 남자의 앞에 우뚝 서서, 망자의 옷을 사내의 눈앞에 내밀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떠냐! 누군가 보고 있나!」
「보지 마――나를――보지 마」
「그게 스위치인가!」
추젠지는 그렇게 내뱉고, 옷을 남자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네놈이 보고 있었던 건 이거다! 네놈에게서 무엇 하나 퇴치해 줄 성 싶나! 자, 이 남자를 어서 어디로든 끌고 가 버려!!」
보지 마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남자는 울부짖으며 옷을 내동댕이치고, 수십의 경관에게 붙들려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을 차고도 남자는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절규하며, 괴로운 듯이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여전히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은 아라노가 연행하도록 지시한다.
「쿄――쿄고쿠――」
키바가 들려나가는 미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당신 탓이 아닙니다」
키바는 굳어진 얼굴로 빌어먹을! 하고 돌바닥을 찼다. 회한은 간단히 표면에 퉁겨나갔다. 이마가와와 마스다, 시바타가 입구 근처에서 넋을 놓고 있다.
「포위망을 좁혀서 놈을 여기로 몰아넣은 건 경찰이다. 하지만――설마 이런 데 박혀 있었을 줄이야!! 하필이면 거기에, 저 애가――」
「아닙니다. 히라노는, 줄곧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눈치를 챘더라면――더구나,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기모노가 방아쇠였습니다. 이건 언젠가 발동하도록 준비되어 있던 함정입니다」
「설마 이것도――계획의 일환이라는 거냐?」
「예. 결국 우리는 또 한 번 거미가 계획한 대로 놀아난 셈이군요. 그 기모노는 본래 스기우라 상이 아니라 미도리 군에게 입힐 목적으로 보내진 겁니다. 다시 말해 이 막은 이 참극을 일으키지 않고서야 끝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미도리 군이 살해된 것이야말로――학원에서 벌어졌던 거창한 촌극에 막을 내리기 위한 신호――인 겁니다」
탐정이 물었다.
「장소가 또다시 바뀐다는 거냐!」
「그렇군요――히라노가 자백하면――아니, 히라노에게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히라노를 조종하는 다음 범인이 누군지는 알았습니다」
「누구야」
「오리사쿠 가의――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기도사는 그렇게 말했다.
엎드러져 뺨을 대어본 돌바닥은 너무나도 딱딱하고 차가웠다.
눈물이 넘쳐흘러서, 바닥이 부예지고 흐려져, 미유키는――.
세계가 잘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죠로구모의 도리 제 1차 클라이맥스. 미도리가 미유키를 인질로 잡는 순간부터 이 장 마지막까지는, S가 죠로구모의 도리에서 엔딩과 프롤로그 다음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모조리 번역이랍시고 찝적대는 테러를;;; ....원문으로 읽었을 땐 그렇게 애틋하고 좋더니만 한국어로 옮기는 순간 팍 죽어버리는 건 역시 S의 능력 부족 탓이겠죠.... OTL)
거짓에 속아서 열세 살 나이에 지탱해 줄 모든 것을 상실한 타천사의 비극.
쿠레 미유키는 진짜로 좋은 아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미유키는 미도리로 인해 요 며칠 간 진짜로 입에 담지 못할 고생을 했습니다. 친한 친구도 잃고, 이사장에게는 욕을 볼 뻔하고, 광인 취급은 받고, 협박당하고, 그렇게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저 아이야말로 미도리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란 것이 정말로 가슴이 찡했습니다. 미도리가 살아만 있었으면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주먹을 쥐고도 들어올리지는 않는' 추젠지 아키히코가 좋습니다. 그나마 주먹으로라도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키바와는 달리 추젠지는 입장 상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야만 합니다. 일방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순간에 그의 쯔키모노오토시는 파탄이 나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무표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정은 마지막 한 톨까지 억제합니다. 보시다시피 키바는 욕지거리라도 하며 바닥을 걷어차지만 추젠지는 도출된 결론을 담담하게 제시하고만 있습니다. (이러고 살다 누리보토케에서 에노키즈에게 대박 혼납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입니다. 구할 수 있었는데, 거의 구할 수 있었는데 눈앞에서 겨우 13살 먹은 어린 소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는 광경을 보아 버린 심경이 어떻겠습니까. 쥐긴 했지만 들어올리진 않은 주먹에, 히라노에 대한 묘한 심술... 이랄까 분풀이에, 보통은 결코 노출시키지 않는 그의 심정 한 조각이 담겨 있는 거겠지요.
잠시 시리어스를 빼고 논하자면, 호흡이 척척 맞는 추젠지-에노키즈-키바 노선도 나이스하고(글쎄 세키구치만 없으면 이 사람들은 천하무적이라니까요), "그게 스위치인가!!" 라는 추젠지의 대사는 발췌 번역 4번에서 에노키즈의 대사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미유키가 인질로 잡히자마자 기민하게 뒤쪽을 확보하는 에노키즈는 앗쌀하고, 추젠지가 미도리의 어머니를 원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애쓸 때 에노키즈가 알아서 경관들을 밀치면서 길을 만드는 거라던가 예배당에 쳐들어와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추젠지의 질문에 재꺽 답변하는 게 에노키즈란 것도 조금 우하우하 하고, 에노키즈가 은근히 추젠지의 쯔키모노오토시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티를 내는 것도 좋고, 죠로구모의 도리는 구석구석이 번뇌덩어리입니다.
이 장이 너무 비극이라서 까놓고 좋아하기에는 S의 빈사 상태의 양심도 욱신거릴 뿐입니다. (먼 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경찰 한 명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고, 이어진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나자빠졌다. 성당 안에 두둥실 바람이 일었다. 구르듯이 달려나온 미도리가――가장 가까이 있던 미유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미유키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유키의 시야에는, 얼굴에서 피를 뿜으며 몸부림치는 경관과, 얼굴을 누르고 허위적대는 또 하나의 경관과, 허둥허둥 일어나는 아라노와, 이소베와, 쯔바타와, 입을 벌린 시바타와 의자를 박차고 이리로 달려오는 키바와, 이마가와와 마스다와, 기민하게 뒤쪽으로 우회하여 버티고 선 탐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추젠지의 말이 왠지 아주 아득하게 들려왔다.
「내게 이 자리에서 전부 퇴치하라는 건가!!」
미유키는 조금씩 오감을 되찾았다.
목덜미에 이물감――차갑고 흉폭한 것.
뾰족한 것이 목에 밀어붙여져 있다.
미유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물새 무늬가 보였다.
그곳에서 새까만 채찍 같은 것을 움켜쥔, 가늘고 하얀 팔이 뻗어나왔다. 채찍 끝이 뺨에 닿아 있다. 미유키는――망자의 옷에 감싸여 있다.
백단향이 풍겼다.
그리고 이 향기는.
――가루분의 냄새?
야치요라는 사람의 기모노.
검은 성모는 더 이상 없다.
그럼, 이 하얀 팔은.
――명계에서 뻗어온 여인의 팔.
귓가에서, 전율하는,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뭐예요. 뭐가 잘났다고! 음탕한 창부 주제에 목에 힘주고 설교하지 말아요! 그래, 여기에 설령 악마가 없다 해도 난 악마야! 누구도 내게 벌을 줄 수 없어! 나는 인간이 아닌 자. 사람을 저주하고 주를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는, 더럽혀진 영혼을 가진 악마의 딸이야! 붙잡을 수 있거든 얼마든지 붙잡아봐요!!」
미도리――.
미유키는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 망자의 옷을 두른 미도리가, 미유키의 목에 칼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건――카와노 유미에의 유품이에요. 자아 어머니, 난 지금 사람을 다치게 했어요. 보고 계셨나요? 지금부터 여기 있는 미유키 상을 죽이겠어요. 어떠신가요?」
――죽여?
「그만두어요 미도리! 대체 무얼 생각하는 건가요! 미유키 상을 어서 놓아주세요!」
모친은 처음으로 딸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제야 겨우 소리를 높이셨군요 어머니!! 그렇죠, 살인에 폭행상해는 중죄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집안이 위험하니까!!」
「미도리!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미유키 상을 어서 놓아요!」
「그것 보세요. 어머니는 친딸인 나보다도 미유키 상이 훨씬 걱정되시는 거죠? 당연해요!! 나처럼 불길하고 꺼림칙한 아인 죽어버리는 편이 나았을걸!!」
――뭐지?
미도리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 어둠은 대체.
기도사가 퇴치하지 않고 남겨두려 한 부분인가.
그곳에 신의 자리는 없는 것인가.
미도리가 말했다.
「미유키 상――」
아직 성숙하지 못한,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
「――미안해요.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그렇지만, 당신도 나빠요――나는 당신이 부러웠어――」
부러워?
「――죽어주세요」
스윽. 목덜미에 섬뜩한 것이 파고들었다.
「멈춰! 자네는 오해하고 있어――」
기도사――.
「――미도리 군이 이토록 오리사쿠 가를 저주하는 이유는, 자네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어떤 의혹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오해일세!!」
「출생? 의혹이라뇨? 대체 무슨 말입니까――」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미도리의 어머니인가.
귓전에서 앳된 목소리가 앙칼지게 외쳤다.
「시침떼지 말아요! 더러운 창녀!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당신네 부부가 얼마나 추하고 지저분한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어째서 낳게 내버려뒀어요! 날 괴롭히고 비참하게 하면서 재미있어 하려고!!」
「무――무슨 말을? 미도리, 무얼 말하고 있는 건가요! 미도리, 똑바로 말해요!!」
모친이 평정을 잃었다. 숨결도 거칠다. 미도리의 심장이 크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들었어요. 전부 들었어. 나는 더러운 인간이에요! 아직도 잡아뗄 작정인가요. 좋아요! 말하겠어요! 똑똑히 들으세요!!」
미도리는 미유키를 방패로 삼고 있다.
――스기우라와 똑같은 장기말.
방금 전의 스기우라 다카오와 완전히 같지 않은가.
――이건, 이 기모노의?
망자의 옷에 잠든 마력?
미유키의 좁은 시야 끝에 검은 신상이 잡혔다.
――신상은. 한 쌍입니다――.
미도리는 방향을 바꾸었다. 미유키의 시야가 회전했다. 하얀 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에 어둠을 품은 소녀는, 둘러싼 어른들과, 둘러싼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고립된 소녀는, 마지막 한 톨마저 쥐어짜듯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아버지 오리사쿠 유노스케와, 언니 유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그렇지요!!」
견고한 건물벽에 반향하여, 사위스러운 말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유키의 귀에 파고들었다.
이것이 암흑의 정체인가.
「무슨――말도 안 되는――」
「그랬으면 나도 좋았겠지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어. 슬프고 괴롭고, 고민스러웠어! 믿고 싶지 않아서, 조사도 해봤어요. 내가 태어난 쇼와 15년(1940년)에, 언니는 1년 정도 집을 비웠었지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언니가」
「그건――병 때문에――」
「나도 알아요. 장기 요양이라고요. 이상해요. 핑계일 뿐이야! 어딘가에서 날 낳은 거야!」
「그렇지 않아!!」
「유카리 언니는 늘 상냥했어. 나는 거의 대부분 어머니가 아닌 언니 손에 자랐어요. 사실을 알았을 땐 온몸에 소름이 끼쳤어! 더러워! 짐승만도 못해! 나는 언니를, 아버지를, 오리사쿠 가를 저주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추한 나 자신을 저주했어. 그러니까 내게는 이것밖에 길이 없었던 거야. 사악함을, 모독적인 행위를 긍정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정당화할 수단이 없었단 말이에요! 뭐예요! 당신들 모두를 증오해! 다 죽어버려!!」
스윽.
목이.
「미도리 군, 그건 전부 지어낸 이야기야!」
――추젠지――상.
검은 옷의 남자는 대열에서 한 걸음 걸어나왔다.
제령하는――건가?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서글퍼 보인다.
「내 말을――들어」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요? 당신은 내게서 마력도 사역마도 전부 빼앗아갔어. 그럼 나는――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채찍에 달린 칼날이 미유키의 숨통을 자극한다.
「그러면 안 돼. 방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미도리 군은 악마가 아니야. 악마는 될 수 없어. 잘 듣게! 돌아가신 유카리 상은 선천적인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어. 때문에 본디부터 오래 살 수 있는 몸도 아니었지. 아이는 낳지 못해」
「거짓말 말아요. 들은 적도 없어」
「비밀이었으니까. 그렇지요 부인」
미도리의 어머니――.
모친은 의연한 모습 그대로 당혹해 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아이는――유카리는 길어봤자 10년이라고 했어요. 가엾어서 그 아이에겐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요. 우리는 언젠가 그날이 오리라 각오하고, 그 아이가 하다못해 미련은 남기지 않도록,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숨기기로 했던 겁니다」
「들었겠지. 미도리 군, 유카리 상이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 리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유카리 상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거야. 여자는 살림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도, 내향적이었던 것도 아닐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에 대해서는――시바타 상,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과 유카리 상의 혼담이 깨진 이유도, 오리사쿠 가가 비밀을 밝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유카리 상에게 발각되면 안 되니까, 표면상으로는 조건이 맞지 않았던 걸로――」
「거짓말! 그 혼담도, 아버지가 언니를」
「있을 수 없어. 자료에 따르면 미도리 군은 유카리 상과 유노스케 씨의 아이가 될 수 없네. 혈액형이 맞지 않아. 미도리 군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배덕의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일세. 자네는 유노스케 상과――여기 마사코 상의 딸이야」
「거――거짓말 말아요! 이 사람은, 나한테 이제껏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어! 웃어준 적도 없었단 말이에요!!」
「미도리!」
어머니가 외쳤다. 떨리는 손을 미도리에게 뻗는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 나름대로의 애정이 있는 거야.
「당신은――당신만은 나와 유노스케 사이에 태어난――아이입니다! 당신을 낳은 사람은 나예요. 이것만은――믿어줘요, 믿어주세요!! 제발」
미도리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럼――그럼 나는――」
기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 군, 미도리 군에게 거짓 사실을 불어넣은 사람은――자네에게 고해실의 열쇠를 넘겨준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자네는――」
「싫어. 나는, 나는――」
미도리의 몸이 떨어졌다.
미유키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야. 그건, 그러면――」
「속았던 걸세. 그 자가――진범이야」
경관이 움직였다.
안 돼, 아직 일러! 추젠지가 외쳤다.
콰당. 문이 활짝 열리며, 세상이 빙글 돌았다.
미도리가 미유키를 떠다민 것이다. 세상이 슈욱 덮쳐들어 온다. 미에가 달려온다. 탐정이 미유키를 넘다시피 지나쳐 밖으로 뛰어나갔다. 형사들이 달린다. 키바가 탁한 목소리로 고함친다. 이봐, 저 애를 어서 보호해 꾸물럭대지 마 병신들아. 성당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읽지 못하는 히브리어. 견고한 건물이 흐물흐물 일그러졌다.
세상이 진작부터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결정권이 없다면, 그건 스스로 살고 있지 않음과 같은 의미.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예비되었던 세상이 허위와 거짓이었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믿고 있는 세계가 반드시 진실만은 아니다. 진실만이 아니라고 알고는 있어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믿지 않고 어떻게 세계를 이해해야 할지 미유키는 알지 못했다. 미도리가 믿고 있었다면,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아파도 그것은 미도리에게 현실이었다. 미도리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 세계가 한낱 허구에 불과하며 단지 미도리만의 것이었다고 해도, 미도리에게 그것은 바로 몇 분 전까지 현실이었다.
미도리는――거짓에 속아 인간을 상실했다. 현혹되어서 신을 상실했다. 그리고, 허식 위에서 허세를 부려 가까스로 지탱해 온 현실을, 세계를 상실했다.
상실할 바에는, 괴롭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계속 속고 있었던 편이――차라리――.
그렇기 때문에――그 기도사는,
지금은 퇴치하지 않겠다고―――.
그랬었는데,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망자의 옷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무척 느리다. 고운 무늬였다.
백단향에 분 냄새가 감겨든다.
그 주위를 다른 세상의 주민들이 원이 되어 돌고 있다. 악마와 마녀가 날뛰는 문란한 세계에 무미건조하고 멋없는 경찰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렇게 미도리는 돌고 있어. 돌면서 경계선을 긋고, 자신만의 세상을 되찾고 있는 거야――.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유키 상!!」
미에의 목소리에 붙들려 미유키는 되돌아왔다.
탐정이――외쳤다.
「네놈들은 방해만 된다. 설쳐대지 말고 빠져!!」
미도리는 샘을 등지고 광란하고 있었다.
수많은 경관에게 둘러싸여, 채찍을 미친듯이 휘두르고 있다.
거칠고 험한 사건밖에 다뤄보지 않은 투박한 경관들은, 세계를 상실한 작고 어린 소녀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원은 조금씩 좁혀지지만,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한다. 추젠지는 반쯤 제정신을 잃은 미도리의 어머니를 잡아끌고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려 한다. 탐정이 경관들을 밀어붙이고 길을 열려 하고 있다. 키바가 고함쳤다.
「이놈들아 비켜! 사내놈들이 떼거리로 어린앨 위협하기냐!! 저리 못 비켜!!」
총성이 울렸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금이 간 미도리의 마음을 산산조각내는 데는 충분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추젠지가 경찰에게 호통을 쳤다.
미도리는 무어라 외치고 경관에게 달려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경관은 흠칫하여, 한 명의 뺨이 날카롭게 찢기고, 공포가 혼란을 가중해, 원이 흐트러지고, 미도리는 그 일각을 돌파했다.
「그 괴상한 방은 어디냐!!」
탐정이 소리쳤다.
미도리가 예배당을 향해 달려간다.
참언(讒言)에 속아 신을 잃고, 인간을 잃고, 세계를 잃은 하얀 얼굴의 타천사는, 악마에게 하사받은 망자의 옷을 두르고 딱딱한 돌길 위를 내달렸다.
선명한 물새 무늬가 나풀나풀 나부낀다.
그날 밤과 똑같다. 나풀. 나풀나풀.
마치 슬로우모션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던 모양이다.
잘려나온 필름의 한 컷이, 미유키의 망막에 계속, 계속 비치고 있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발이 빠른 탐정도 굳건한 형사도, 썩도록 넘쳐나는 수많은 경관도, 누구 하나 미도리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미도리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탐정과 키바가 그 뒤를 쫓고, 뒤이어 형사와 경관들도 돌입했다. 그 또한 일순간에 벌어졌으며, 모든 것이 불과 수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괴상한 방? 그런가――저기에는, 예배당에는 고해실이 있어――아뿔싸!!」
추젠지는 화살같이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미유키도 미에의 손에서 빠져나와 그 뒤를 따랐다.
「어떻게 됐나! 잡은 건가!!」
예배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추젠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마어마한 반향이 예배당을 진동시켰다. 무수한 사람들이 한 구석에 몰려들어 있다. 대답한 것은――탐정이었다.
「여기다! 여기로 들어갔어!!」
탐정은 오른편의 커다란 목제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괴상한 방――열리지 않는 고해실이다.
탐정은 둘러싼 경관들에게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바보 형사놈들이!! 저 남자에게 맡겨두었으면 좋았을 일을!! 타이밍도 못 맞추는 어리석은 놈들에게 사건에 개입할 자격은 없다!!」
「비켜 에노!!」
키바 형사가 돌진하여 문짝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제기랄!」
「이봐, 이 문을 어서 열어. 속히 투항해라!」
다가온 아라노가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에 키바는 안색을 바꾸고 아라노를 때렸다.
「이 머저리가! 말은 가려해! 병신 새끼!」
아라노는 맞은 뺨을 누르고 우와우와 죽는 소리를 질렀다.
시바타가 창백히 질린 미도리의 어머니를 데리고 들어왔다.
초췌해진 시바타는, 그럼에도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부인과 함께 고해실로 향했다. 미유키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 문득 몸을 돌려 추젠지를 보았다.
기도사는 붙박힌 듯이 서 있었다.
좋지 못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무엇을――.
무엇을 예측했지?
모친은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와, 쓸모없는 경관들을 좌우로 헤치고 열리지 않는 고해실의 문 앞에 섰다.
어머니는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미도리 상. 이제, 이젠 괜찮아요. 당신이 어째서 이래야만 했는지 잘――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미유키는 참을 수 없었다.
저 방은 외톨이인 미도리만의 방이다. 나쁜 말에 희롱당하고 절망한 미도리는 거기에서 악마를 만나, 악마를 자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누군가의 함정이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유키는 달렸다.
예배당에서 달려보는 게 꿈이었다.
성당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게 꿈이었다.
언제나 신성한 장소에서 소란을 피워보고 싶었다.
소란을 피워도 달려도 외쳐도, 이래서야 조금도 즐겁지 않아!
뚜벅뚜벅 발소리만이 울렸다. 미도리, 미도리――어머니가 부르고 있다.
미유키는 고해실로 달려갔다. 열리지 않는 문이 눈앞으로 닥쳐들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미도리!」
문이 열리고, 물새 무늬의 등이 나타났다.
등은 한 번 휘청 떨리고,
――막대기가 쓰러지듯.
미유키를 향해, 위를 보고 무너졌다.
기모노의 소매가 철럭 부풀고, 힘없이 가라앉았다.
찰랑찰랑한 새까만 머리카락이 돌바닥 위에 흐트러졌다.
「미――도리?」
세설(細雪)처럼 새하얀 피부.
촉촉한 긴 속눈썹에 감싸인,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
오른쪽 눈에는 예배당의 천장이 비치고.
왼쪽 눈에는.
검은 끌이――깊숙이 박혀 있었다.
「미도리!」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두세 번 경련하고,
멎었다.
「아――안 돼――!」
어머니는 숨이 막힐 듯한 비명을 지르며 딸의 몸을 감싸듯이 그 위로 무너지고, 미유키는 푸슬푸슬 주저앉아 문 안을 보았다.
방 안에 흑표범 같은 남자가 있었다.
「나를――나를 보지 마!!」
사내는 보고 있는 미유키가 아닌 미도리의 어머니를 덮쳤다.
「히라노! 이 새끼!!」
사내는 달려드는 키바를 민첩하게 피하고, 미도리의 안구를 꿰뚫은 끌을 뽑으려 손을 뻗쳤다. 뻗친 손을 탐정이 차올렸다. 걷어채인 손목을 즉시 키바가 틀어쥐었다. 키바는 돌아선 사내의 뺨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갈겼다. 사내는 날려가다시피 경관들 속에 처박혀, 여러 명에게 짓눌려 바닥에 엎어졌다. 키바는 경관들을 밀치고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세 번 더 때렸다.
「이 자식, 여잘 몇 명 더 죽여야 속이 후련하냐!!」
네 번째로 들어올린 주먹을 추젠지가 붙들었다.
키바는 몸을 돌려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본다.
추젠지는 잠자코 남자의 멱살을 키바의 손에서 낚아채, 사신 같은 눈으로 얼굴을 노려보았다.
주먹을 쥔다. 그러나 움켜쥔 주먹은 올라가지 않았다.
추젠지는 낮은 목소리로 저주하듯이 내뱉었다.
「네놈 따위――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
「엣?」
사내는 정지했다.
추젠지는 남자를 홱 떠다밀고, 미도리 쪽으로 향했다.
이소베와 도쿄에서 온 형사가 미도리의 어머니를 짊어지다시피 일으켜세우고, 경관들이 미도리를 둘러싸고 있다. 웅크리고 앉은 쯔바타가 돌아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젠지는 형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미도리의――미도리의 시체를 안아 일으켜,
조심스럽게 망자의 옷을 벗겨냈다.
그리고 옷을 손에 들고 유령처럼 스윽 몸을 일으켜, 흡사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다시 한 번 남자의 앞에 우뚝 서서, 망자의 옷을 사내의 눈앞에 내밀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떠냐! 누군가 보고 있나!」
「보지 마――나를――보지 마」
「그게 스위치인가!」
추젠지는 그렇게 내뱉고, 옷을 남자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네놈이 보고 있었던 건 이거다! 네놈에게서 무엇 하나 퇴치해 줄 성 싶나! 자, 이 남자를 어서 어디로든 끌고 가 버려!!」
보지 마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남자는 울부짖으며 옷을 내동댕이치고, 수십의 경관에게 붙들려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을 차고도 남자는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절규하며, 괴로운 듯이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여전히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은 아라노가 연행하도록 지시한다.
「쿄――쿄고쿠――」
키바가 들려나가는 미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당신 탓이 아닙니다」
키바는 굳어진 얼굴로 빌어먹을! 하고 돌바닥을 찼다. 회한은 간단히 표면에 퉁겨나갔다. 이마가와와 마스다, 시바타가 입구 근처에서 넋을 놓고 있다.
「포위망을 좁혀서 놈을 여기로 몰아넣은 건 경찰이다. 하지만――설마 이런 데 박혀 있었을 줄이야!! 하필이면 거기에, 저 애가――」
「아닙니다. 히라노는, 줄곧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눈치를 챘더라면――더구나,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기모노가 방아쇠였습니다. 이건 언젠가 발동하도록 준비되어 있던 함정입니다」
「설마 이것도――계획의 일환이라는 거냐?」
「예. 결국 우리는 또 한 번 거미가 계획한 대로 놀아난 셈이군요. 그 기모노는 본래 스기우라 상이 아니라 미도리 군에게 입힐 목적으로 보내진 겁니다. 다시 말해 이 막은 이 참극을 일으키지 않고서야 끝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미도리 군이 살해된 것이야말로――학원에서 벌어졌던 거창한 촌극에 막을 내리기 위한 신호――인 겁니다」
탐정이 물었다.
「장소가 또다시 바뀐다는 거냐!」
「그렇군요――히라노가 자백하면――아니, 히라노에게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히라노를 조종하는 다음 범인이 누군지는 알았습니다」
「누구야」
「오리사쿠 가의――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기도사는 그렇게 말했다.
엎드러져 뺨을 대어본 돌바닥은 너무나도 딱딱하고 차가웠다.
눈물이 넘쳐흘러서, 바닥이 부예지고 흐려져, 미유키는――.
세계가 잘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죠로구모의 도리 제 1차 클라이맥스. 미도리가 미유키를 인질로 잡는 순간부터 이 장 마지막까지는, S가 죠로구모의 도리에서 엔딩과 프롤로그 다음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모조리 번역이랍시고 찝적대는 테러를;;; ....원문으로 읽었을 땐 그렇게 애틋하고 좋더니만 한국어로 옮기는 순간 팍 죽어버리는 건 역시 S의 능력 부족 탓이겠죠.... OTL)
거짓에 속아서 열세 살 나이에 지탱해 줄 모든 것을 상실한 타천사의 비극.
쿠레 미유키는 진짜로 좋은 아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미유키는 미도리로 인해 요 며칠 간 진짜로 입에 담지 못할 고생을 했습니다. 친한 친구도 잃고, 이사장에게는 욕을 볼 뻔하고, 광인 취급은 받고, 협박당하고, 그렇게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저 아이야말로 미도리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란 것이 정말로 가슴이 찡했습니다. 미도리가 살아만 있었으면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주먹을 쥐고도 들어올리지는 않는' 추젠지 아키히코가 좋습니다. 그나마 주먹으로라도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키바와는 달리 추젠지는 입장 상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야만 합니다. 일방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순간에 그의 쯔키모노오토시는 파탄이 나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무표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정은 마지막 한 톨까지 억제합니다. 보시다시피 키바는 욕지거리라도 하며 바닥을 걷어차지만 추젠지는 도출된 결론을 담담하게 제시하고만 있습니다. (이러고 살다 누리보토케에서 에노키즈에게 대박 혼납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입니다. 구할 수 있었는데, 거의 구할 수 있었는데 눈앞에서 겨우 13살 먹은 어린 소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는 광경을 보아 버린 심경이 어떻겠습니까. 쥐긴 했지만 들어올리진 않은 주먹에, 히라노에 대한 묘한 심술... 이랄까 분풀이에, 보통은 결코 노출시키지 않는 그의 심정 한 조각이 담겨 있는 거겠지요.
잠시 시리어스를 빼고 논하자면, 호흡이 척척 맞는 추젠지-에노키즈-키바 노선도 나이스하고(글쎄 세키구치만 없으면 이 사람들은 천하무적이라니까요), "그게 스위치인가!!" 라는 추젠지의 대사는 발췌 번역 4번에서 에노키즈의 대사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미유키가 인질로 잡히자마자 기민하게 뒤쪽을 확보하는 에노키즈는 앗쌀하고, 추젠지가 미도리의 어머니를 원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애쓸 때 에노키즈가 알아서 경관들을 밀치면서 길을 만드는 거라던가 예배당에 쳐들어와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추젠지의 질문에 재꺽 답변하는 게 에노키즈란 것도 조금 우하우하 하고, 에노키즈가 은근히 추젠지의 쯔키모노오토시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티를 내는 것도 좋고, 죠로구모의 도리는 구석구석이 번뇌덩어리입니다.
이 장이 너무 비극이라서 까놓고 좋아하기에는 S의 빈사 상태의 양심도 욱신거릴 뿐입니다. (먼 눈)